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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벽돌인지 아닌지, 그림자인지 아닌지… 들여다볼수록 신비

성곡미술관 ‘김강용:극사실적 벽돌’전 ‘벽돌화가’의 반백년 화업 한곳에 모아 모래·접착제 섞어 캔버스에 펴 바르고 벽돌 공간 파낸 후에 새 모래 채워 작업 “점·선으로 만든 면, 면들이 만드는 화면 강렬한 시각적 경험·사색의 시간 선물”

성곡미술관 ‘김강용:극사실적 벽돌’전
‘벽돌화가’의 반백년 화업 한곳에 모아
모래·접착제 섞어 캔버스에 펴 바르고
벽돌 공간 파낸 후에 새 모래 채워 작업
“점·선으로 만든 면, 면들이 만드는 화면
강렬한 시각적 경험·사색의 시간 선물”
김강용 작가가 상감기법으로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 성곡미술관 제공

거대담론의 시대, 한 청년의 시선이 작디작은 것들에 머물렀다. ‘가녀린 풀 한 가닥이 모여 들판을 이루고, 가장 작은 모래알과 흙을 빚어 거대한 건물을 세운다. 국가를 이루는 것도 결국 소중한 한 사람.’ 독재정권 시대를 건너던 청년은 소외된 장소, 그곳을 구성하는 돌들, 들판을 이루고 있는 잔디, 벽돌과 모래를 그려내기 시작한다. 이어 모래알에 천착하길 반백년. 훗날 청년은 ‘벽돌 화가’로 불리게 된다.

서울 종로구 경희궁길에 위치한 성곡미술관에서는 지난 13일부터 ‘김강용:극사실적 벽돌’전이 열리고 있다. 2009년부터 이어오고 있는 ‘한국원로작가 초대전’의 일곱 번째 주인공, 김강용 화백의 작품을 모았다. 1970년대 중반 제작된 초기작부터 최신작까지 약 50년의 화업을 아우른 대규모 회고전이다.

‘현실+장 78-1’(1978)

전시는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한 예술가의 일생을 보여준다. 1970년대는 ‘현실+장(場)’ 연작으로 대표되는 시기다. 푸른 하늘 아래 돌담이 처참히 깨지고 무너진 자리, 입산금지 표지판이 떠내려오고 철책이 쳐진 계곡, 민초가 연상되는 풀이 무성한 들판. 특유의 세밀한 모사로 장소성을 강조했다. 깨지고 무너진 벽돌들에서 느껴지는 정서는 훗날 그가 왜 ‘벽돌 화가’가 됐는지 추정해보는 힌트다.

모래와 흙을 작품세계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는 시기(1980∼90년대)가 두 번째다. 이 무렵 ‘현실+장’ 연작은 더 이상 캔버스에 물감으로만 극사실적 묘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캔버스 화면에 직접 모래를 바르고 그 위에 그림자를 그려넣는다. 모래 재료를 만나 작품세계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시기다.

최초의 모래벽돌 작업인 ‘현실+장 76-15’(1976)

2000년대 이후엔 모래벽돌 작업이 다양하게 변주되며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허무는 김강용만의 세계로 도약한다. 트레이드마크가 된 벽돌은 모노톤으로, 때로는 색에 물든다. 화면 자체의 조형성을 연구하는 연구자가 된 그는 성숙한 기법으로 마법 같은 화면을 선보인다. 캔버스에 바른 모래와 그림자는 더욱 치밀해져 가짜 벽돌들이 과거보다 더욱 진짜 벽돌처럼 보이다가도, 빨간 그림자, 파란 그림자와 같은 실재하지 않는 장치들로 관람객의 머리를 때린다. 재현적 작업이 개념적 작업으로 전환된 것으로 평가되는 단계이자, ‘현실+장’에서 ‘현실+상(狀)’으로, 즉 그림의 대상이 장소에서 이미지로 안착한 시기다.

2000년대 이후 작품들 앞에 처음 서면, 반응은 누구나 똑같다. 두 눈동자에 잔뜩 힘을 주고 또 봐도 소용없다. 눈을 껌뻑거려봐도 마찬가지다. 캔버스 앞에서 한참을 바보처럼 서있지만, 색색의 아름다운 벽돌들을 실제로 쌓아올린 입체적인 사물이 아니라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캔버스 화면일 뿐이다. 확신이 들면, 그제서야 동심으로 돌아간 어린이처럼 신기해한다. 전시장에서 만난 김강용 화백은 말했다. “경험해본 적 없는 시각적 경험을 주고 싶다. 그것도 강렬하게.”

 

그는 제작 비밀도 공개했다. 체에 거른 고운 모래를 접착제와 섞어 캔버스 위에 균일하게 펴바른다. 캔버스를 하루 동안 물에 불린 뒤 다른 색상의 벽돌이 들어갈 공간을 그리고 정확하게 파낸다. 새로운 모래를 채워넣는다. 상감기법이다. 이어 유화물감으로 그림자를 그려넣는다. 캔버스에 발린 모래의 두께는 모래알 한 알 지름의 얇기. 제작과정을 두고 이수균 학예연구실장은 “수신(修身)의 과정에 가깝다”고 했다. 조금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으며, 기술자도 고용해봤지만 대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김 화백은 “온갖 색깔을 다 넣는 것이 엄청난 도전이었다”며 “미장이와 함께 작업해봤는데 건물은 올려도 이건 못하겠다며 손사래를 쳤다”고 한다.

재료를 준비하는 과정도 작품의 일부다. 초기엔 한강에서 모래를 채집해 단일재료로 사용했고, 이후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모래를 채취해 한 화면 안에서 서로 다른 모래의 빛과 텍스처가 공존토록 했다. 천연석과 대리석을 갈아 만든 색색의 공업용 규사까지, 재료는 확장돼 갔다. 사진을 통해 엿본 그의 작업실 한쪽엔 매직으로 속초, 사천, 화진포 등 지명을 써둔 플라스틱 통과 바구니들이 가득하다.

 

그의 회고전은 그 어떤 전시보다 읽을거리가 많다. 풍부한 해석으로 마치 두꺼운 백과사전 같은 느낌이다.

‘현실+상 1304+1348’(2014)

인간은 흙으로 돌아간다는 비유에서 연상되는 이미지 때문인지, 평생 모래에 천착한 그 생이 한 실존주의자의 평생의 물음처럼 다가온다. 분명 극사실적인 구상화로 보이는데, 마크 로스코의 거대한 색면추상화처럼 숭고함이 전해지기도 한다. 확신에 찬 선은 명쾌하고 냉정한데, 벽돌인지 아닌지, 그림자인지 아닌지 들여다볼수록 상반된 요소들이 복합돼 있어 결국은 모호해지는 화면이 신비롭다. 벽돌은 이러할 것이며 그림자는 이렇게 나타날 것이라고 학습된 편견을 일으킨 뒤 모든 것은 착시라고 이야기하는 대목에선 계몽의 시도 같다.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가상의 벽돌로 가상과 실재 사이에서 철학절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 순간,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를 연상할 수밖에 없다. AI(인공지능)와 VR(증강현실), 가상의 주체와 가상의 현실이 눈앞에 펼쳐진 오늘을 예견한 것만 같다.

지적인 유희로 가득한 작품세계는 읽을 것 없는 껍데기들과 대조된다. 예술을 참칭하는 문화상품, 사색 없는 감각 과잉의 인스타그래머블한(instagramable) 이미지들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시대에, 그의 작품들은 ‘껍데기는 가라’고 소리없이 외친다. 가장 고전적인 것이 현대적이고 가장 정통적인 것이 미래적임을 보여주면서 정통회화만이 줄 수 있는 사색의 시간을 선물한다. 바이러스로 모든 것이 반강제로 멈춘 내향(內向)의 시간, 어쩌면 회화가 선물하는 사색의 시간을 가질 기회일지 모른다.

50년 화업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만큼, 최신작에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며 역순으로 관람해보는 것도 흥미롭다. 오늘날 신비로운 그림이 가진 비밀을 과거 그림에서 찾아내고 추측해보는 재미가 크다. 지금은 알지만 그때는 몰랐던 것들도 발견한다. 현재를 보고난 뒤 과거로 거슬러 가 그의 청년 시기 초기작을 보면, 그 청년은 현실을 극사실적으로 그렸던 화가가 아니라, 일찌감치 숭고미에 눈뜬 청년으로 다가온다.

50년의 회고는 50년의 혁신이기도 하다. 그에게 모래의 의미도 변했다고 한다. 처음엔 개별인간의 숭고함을 은유한 데에서 시작됐지만, 지금 모래알은 그에게 점이다. 점과 선으로 만든 면, 그 면들이 만드는 하나의 신비로운 화면을 만들고 있어서다. 김 화백은 세 시기로 나뉜 전시를 굳이 “네 단계로도 나눌 수 있다”고 부연했다. ‘최신작’ 시기를 구분해 넣어서다. 또 다른 혁신으로 새로운 단계를 밟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처럼. 9월20일까지.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
출처 : 세계 일보 https://www.segye.com/newsView/20200827520783?OutUrl=na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