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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브제가 된 캔버스

고충환(Kho, Chung-Hwan) / 미술평론

외관상 허욱의 작업은 내용미학보다는 형식미학에 가깝다. 주지하다시피 형식미학은 장르적 특수성에 천착한 모더니즘 서사의 산물이며, 회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여타의 형식적인 요소들에서 회화의 특수성을 찾는다. 작가의 작업은 이러한 형식주의적 환원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더니즘 서사와 통한다. 그런가하면 회화와 조각, 평면과 입체, 그리고 심지어는 건축적인 구조와 설치의 경향마저 아우름으로써 모더니즘 서사를 넘어서고 있다.

이처럼 모더니즘 서사를 공고히 하면서 동시에 이를 돌파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한다거나, 모더니즘 서사에 대한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끌어안으면서 그 변형과 확장 가능성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모더니즘 서사에 대한 일종의 종합적인 인식이 발견되고 있다. 모더니즘의 기획은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고 선언한 하버마스의 전언이나, 이성의 간계에 대한 헤겔의 전언이 물적 형식을 덧입고 표상된 것이라고나 할까. 이성(순수형식)에 대한 긍정은 물론이거니와 그 부정마저도 모더니즘 기획의 한 측면으로 싸안고자 하는 것이다. 허욱의 작업은 이처럼 모더니즘 서사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에 의해 지지된다. 형식주의적 환원과 확장이 공존하고, 단위구조 내지는 단위원소의 집합과 해체가 동시성을 얻는 것에서 특유의 긴장감이 감지된다.

허욱의 작업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캔버스를 대하는 그의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에게 있어서 캔버스는 더 이상 어떤 이미지를 덧그리기 위한 지지대 내지는 부수적인 장치가 아니다. 캔버스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 캔버스 자체의 자족적인 존재성을 되돌려준다. 이를테면 그 자체 독자적인 낱낱의 작은 캔버스들이 모여 하나의 전체 화면을 재구성해내는 식이다. 이를 위해 작가는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과 과정을 통해 서너 개의 양식화된 패턴을 그리고, 그 패턴에 맞춰 캔버스를 짠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원형이나 반원, 그리고 퍼즐조각을 연상시키는 형태의 틀을 만든 후, 천 조각으로 그 틀들을 일일이 씌워 여러 크고 작은 비정형의 캔버스를 만든다. 그리고 그 작은 캔버스들을 모자이크처럼 조합해 하나의 큰 그림을 축조해내는 것이다. 이렇게 축조된 최종 화면에서는 크고 작은 틀들이 중첩된 입체적인(엄밀하게는 부조적인) 효과와 함께 그 위에 덧그려진 추상적인 색면이나 패턴(대개는 줄무늬가 반복된)이 어우러져 리드미컬한 내적울림을 자아낸다.

작가는 이처럼 캔버스의 정형화된 구조와 틀을 해체해서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캔버스 자체를 일종의 자족적인 오브제로 간주하는 <쉬포르쉬르파스>(지지대와 지지체)와도 통한다. 주지하다시피 쉬포르쉬르파스는 캔버스를 재현회화(현실적이고 비현실적인, 구상적이고 추상적인 재현 일체를 아우르는)의 부수적인 장치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그 자체를 독자적인 오브제의 일종으로 간주할 수 있게 했다. 이러한 그들의 태도는 이후 현대미술의 새 장을 연 것으로까지 평가되고 있다.

이와 함께 허욱의 작업은 하나의 단위원소를 모듈삼아 이를 반복적으로 중첩 나열한다. 이를 위해 대략 서너 가지 정도의 기본 모형이 선택되는데, 그 모형을 반복 중첩시켜 정형이나 비정형의 패턴을 재구성해내는 것이다. 이처럼 기본 모형이 있지만, 그러나 그 기본형으로부터 반복 재생산된 모형들 모두가 똑같은 것은 아니다. 외관상 그 크기나 형태가 엇비슷한 모형들이 사실은 일일이 수작업을 통해 직접 제작한 것으로서 약간씩 다른 형태를 띠게 된다. 이처럼 최소한의 모형을 단위원소삼아 이를 반복 중첩시킨 작가의 작업은 일견 부분과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에 대한 인식(총체성의 인식)에 의해 견인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이면에 일종의 차이를 내포한(혹은 차이를 만들어내는) 반복의 실천논리(차이의 논리)가 작동되고 있는 것이다.

오브제(군소모형)가 제작되는 과정도 그러하지만, 특히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는 것에서 이러한 차이의 논리는 극대화된다. 예외인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오브제 뒷면에 자석이 부착돼 있어서 관객이 마치 레고처럼 그 모형들을 자의적이고 임의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심지어 작가가 구획해 놓은 프레임을 벗어난 벽면 위에다 모형을 부착할 수도 있다. 결국 작가가 제시한 최초의 구성은 관객의 참여와 간섭으로 인해 재구성되고, 나아가 프레임으로 설정해 놓은 경계마저도 그 의미를 잃고 만다. 이러한 사실은 작가의 작업이 결정적이기보다는 비결정적이며, 최종적이기보다는 임시적인 논리와 현재진행형의 시제에 의해 견인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언제든 수정과 첨삭이 가능한 열려진 구조를 지향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더욱이 사실상 공간을 점유하며 작품의 표현영역을 무한정 확장시킬 수 있는 가능성(그 자체 설치미술의 경향성을 아우르는)마저 열려있게 된다.

이런 열려진 구조나 비결정적인 성질은 작가가 일관되게 심화시켜온 주제인 <첨첨 사이>(添添 사이)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형식이나 의미가 계속해서 쌓이거나 덧붙여지는 과정을 암시하는 이 주제처럼 허욱의 작업은 완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며, 이를 가능케 하는 계기로서 관객의 참여는 결정적이다. 이처럼 최종적이기보다는 어떤 임의적인 지점에다가 정체성을 세운다든가, 나아가 관객의 참여와 간섭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작가의 작업 고유의 미덕과 포용력이 읽혀진다.

이로써 작가의 작업은 종전의 평면이나 입체 어디에도 범주화되지 않는 독특한 지점을 예시해주고 있다. 이를테면 작가는 최소 단위원소로 제작된 모형들을 중첩시켜 대개는 전체적으로 사각의 틀(프레임) 모양이 되도록 재구성하는데, 이렇게 재구성된 화면은 전체적으론 평면이지만, 측면에서 보면 평면 위로 돌출돼 보이는 화면이 평면의 경계를 넘어선다. 평면과 입체 어디에도 예속되지 않으면서, 동시에 이 모두를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평면과 입체의 경계 위에 위치한다고나 할까. 그 이면에선 일종의 변형 캔버스에 대한 인식이 발견되는데, 이는 캔버스 자체의 자족적인 존재성을 인정하는 태도와도 통한다.

이처럼 작가의 작업은 최소 단위원소가 반복 재생산된 것이란 점에서 양식화와 패턴화의 경향성에 의해 지지되며, 동시에 그 경향성은 패턴을 해체하는 또 다른 계기에 의해 견제되고 조정을 받는다. 패턴을 지향하는 운동성과 패턴을 해체하는 운동성이 부닥치고, 정적인 계기와 동적인 울림이 삼투되며, 환원(구심력으로 작용하는 힘)과 확장(원심력으로 작용하는 힘)의 대립되는 두 계기가 서로 스며들면서 특유의 긴장감을 조성한다.

그런가하면 작가의 작업은 외관상 형식적인 측면이 강하면서도 내용적인 성질을 결여하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전체 화면을 구성하는 군소모형들 하나하나는 관계의 계기로서 작용하고 있다. 모형들이 모여 전체 화면을 일궈내는 것은 그대로 관계가 형성되는 과정에 의해 지지되며, 이는 또한 익명의 주체들이 서로 어우러져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암시한다. 아마도 관객의 참여를 통해 이렇듯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는 과정을 추체험하게끔 유도하는 것이야말로 작가의 작업의 숨은 뜻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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