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호의 회화는 ‘기억’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사람의 기억은 객관적이라기 보다는 주관적이고 자의적이다. 정재호는 그 중에서 시각 기억에 초점을 맞춘다. 그렇기에 그의 캔버스에는 그가 자주 보는 도시의 풍경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완전 기억 능력, 즉, 토탈 리콜total recall의 능력이 없는 이상, 기억은 변질되기 마련이다. 이미지가 기억에 남기 위해서는 의미화가 필수적이다. 오래 기억하기 위해 시각적 자극들이 기호화 되는 순간부터 이미지는 주체에 의해 선택되고 변형된다.
정재호는 사진 이미지를 모태로 작업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물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가 아니다. 정재호는 형상을 단순화하고 패턴화하며, 인공적인 색채들을 부각시킨다. 자주 나타나는 유리나 거울의 표면에 반사되어 보이는 형상들은 도시 생활에서의 시각적 경험을 강조한다. 사진에 남긴 이미지들을 소재로 하면서도 그의 작품에서 이미지들은 파편화되고 분절된 양상을 보인다. 단색으로 이루어진 선이나 잎사귀의 형상, 교통 콘, 표지판, 차양 등이 양상을 주도하는 역할을 한다. 교통 콘이나 표지판, 차양 등은 풍경에서 그 형광의 색채를 통해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정재호의 작품에서 이는 시각적 기억의 단절로 나타난다. 단색으로 이루어진 선, 그리고 잎사귀와 나뭇가지의 형태들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이들은 표지판이나 차양과 같이 도시의 광경에서 주체의 시선을 끄는 존재들이라기보다는, 주체 자신으로부터 나와서, 시각 기억에 일종의 틈새를 만드는 존재들이다. 이 첨가된 요소들은 실생활에서도 그렇듯이 화면 속에서도 보는 이의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작가는 이렇듯 자신의 방식으로 파편화되고 해체된 이미지들을 다시 조합하면서 주관적 시각 기억을 형상화한다.
정재호는 다양한 매체를 통한 표현을 시도하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디지털 드로잉 작업을 처음으로 선보인다. 그는 컴퓨터를 이용, 사진에서 선과 형태를 지우거나 첨가하며 이미지를 계속 변형시키는 방법으로 작업을 한다. 그 표현 언어는 다르지만, 평면 작업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미지의 생성과 해체가 반복되면서 새로운 이미지가 탄생한다. 디지털 드로잉 작업은 이미지를 쌓아가는 회화 작업과는 다르게 원래의 이미지에 계속해서 삭제하거나 덧붙임으로써 변형을 가한다는 작업 방식을 통해 시각 기억의 변형을 좀 더 과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또한 전시를 위해 월 페인팅 <유포리아Euphoria>를 설치한다. 월페인팅 작업은 한정된 캔버스를 벗어나 해방감을 제공하고 공간감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정재호는 자극적이고 인상적인 색들의 시트지를 사용하여 그의 월페인팅을 제작한다. 작품의 선들을 마치 폭발과 같이 공간을 덮어나간다. 그러나 전시에서 그의 월페인팅 작업은 전시 후 해체되며, 영속적이지 않다. 정재호는 월페인팅 작업과 회화 또는 디지털 드로잉 작업을 결합하는 설치 방식을 통해 그의 표현 언어를 확장시킨다.
‘유포리아’는 극도의 쾌감과 행복을 느끼는 감정 상태를 일컫는다. 마약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는 이러한 비정상적 상태는 우리 주변의 넘쳐나는 시각적 자극들에 대한 마비를 연상시킨다. 화려하고 유혹적인 도시, 사고 현장의 광경, 유리와 거울로 이루어진 건물들은 해체되고 파편화되어 돌아와 내재된 시각 기억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